윤석열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꿈은 경제학자나 물리학자였다고 한다.
윤석열이 대학에 입학한 1979년은 혼란의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고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을 장약했다.
법대 선배들이 기자들에게 정보를 듣고 돌아온 뒤 대학 축제를 맞아 모의재판을 기획했다. 윤석열은 여기서 재판장을 맡아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소식이 호외신문에 실렸다. 이 일이 문제가 되면서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는 먼 친척이 빨리 피해야겠다고 윤석열에게 알려줬다. 그는 3개월 동안 강원도 친척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석열의 꿈은 검사가 아닌 법대 교수였다. 사법고시를 치르는 것도 교수가 되려는 꿈의 일부였다.
윤석열은 사람 챙기는 것과 술자리를 좋아하고 오지랖도 넓은 편이라 사법고시 2창에 번번이 미끄러졌다. 신림동 고시촌의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지며 붙은 별명이 '신림동 신선'이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이 시절 윤석열은 결혼한 친구 부탁을 받고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윤석열은 친구 조부모가 상을 당하면 상여를 메고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얘기도 있다. 지방에 있는 친구가 결혼 소식을 알리면 내려가 함을 지기도 했다.
윤석열은 사법고시 9수 끝에 1991년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3기 동기로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 조윤선 전 장관, 강용석 변호사 등이 있다.
윤석열은 검찰 내부에서도 '보통이 아닌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승진은 물건너간 외골수'라는 비아냥도 받았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윤석열과는 악연이 있다. 김대중 정부 때 우리도 혼이 났다. 청와대에도 임명하지 말라. 당신들 다 죽는다"고 말렸다고 말한 바 있다.